배영수 기자
(뉴스통신=배영수 기자) 한강 작가가 10일 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경기도교육청의 과거 행적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과거 보수 성향의 학부모단체들이 강제한 민원을 받아 폐기에 나선 도서들 가운데 한 작가의 책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기도 주민들은 물론 정치권에서까지 비난의 화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인 11일 경기도교육청 자유게시판에는 ‘여기가 노벨문학상 소설을 유해도서로 지정한 교육청인가요?’, ‘경기도민이라는 게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등 비판의 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11일까지 올라오고 있는 글들의 내용은 “노벨문학상 책을 폐기한 무식한 교육청에 자식을 맡기고 있음이 부끄럽다”, “노벨문학상 작품을 유해도서로 지정한 대단한 교육감 뽑아놓으셨다” 등 비아냥 일색이다.
또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는 “‘채식주의자’ 등 도교육청이 폐기에 나섰던 한강의 작품들을 조속히 초·중·고 도서관에 다시 배치하고 청소년 권장도서로 지정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고 밝히며 인증을 하는 등의 글들도 올라오고 있는 형국이다.
경기도교육청이 이 같은 비난의 여론으로 구설수에 오른 건 이유가 있다. 지난해 한 보수 성향의 학부모 단체 등이 도교육청에 ‘청소년 유해도서를 분리 및 폐기하라’는 일방적이고 ‘정치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류의 민원을 제기했는데 도교육청이 이를 수용하면서 일찌감치 문제가 됐었기 때문.
이에 도교육청은 동년 11월 각 학교에 ‘부적절한 논란 내용이 포함된 도서에 대해 협의해 조치하라‘는 취지의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내면서 사실상 이 민원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를 취해 당시 일선 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던 관계자들이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공문에는 “학교 도서관에 비치된 일부 유해한 성교육 도서에 선정성, 동성애 조장 등 도서를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는 민원이 있다”며 “학교 도서관 운영위원회 등과 협의해 교육목적에 적합하도록 조치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해를 넘겨 올해 2월 도교육청은 학교 도서관 운영위원회의 운영 현황을 기한 내 제출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며 “학생들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위해 성교육 도서 선정 및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요청한다”라는 내용을 첨부하기도 했다.
이에 당시 경기지역 학교 도서관에서는 최소 2,500권 이상의 도서가 폐기됐는데 이렇게 폐기된 도서 중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역시 노벨문학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등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독일에서 ‘올해의 과학도서상’ 수상 도서였던 ‘사춘기 내 몸 사용설명서’와 영국의 교육전문지에서 ‘올해의 지식상’을 받기도 했던 ‘10대들을 위한 성교육’ 등 성교육 관련 도서들도 폐기된 도서에 포함돼 있었다.
결국 학교현장 교육 등에 무지한 보수 성향의 학부모단체들의 일방적인 주장들을 도교육청이 맹목적으로 받아 이를 억지로 학교 현장에 적용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러자 도교육청은 이날 “우리 교육청은 특정 도서를 유해도서로 지정하고 폐기를 지시한 적은 없다”는 입장문을 냈다.
지난해 11월 공문은 학교 도서관 운영위 협의에 따라 조치하라는 요청만 했고 폐기 도서 선정은 각급 학교의 도서관운영위에서 선정된 것이라는 해명인데 상당수 도민들은 어이가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 이날 올라온 글들 가운데서는 “그 폐기를 결정토록 도교육청이 가이드 또는 공문을 내린거잖느냐, 그렇다면 그 폐기를 결정한 각급 운영위의 명단을 모두 공개해서 면면을 한번 보자”는 항의글도 있었다.
당시 공문을 받았던 사서 교사들 중에서도 도교육청의 이러한 해명은 ‘어불성설’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당시 공문에서 적잖은 사서 교사들이 특정 도서를 폐기하라는 압박으로 실제 체감됐다는 것.
실제 경기지역의 한 사서 교사는 “그때 공문을 받은 이후 교장이 ‘(분위기를 봐서) 그냥 한 권 정도만 폐기하면 안 되겠느냐’라는 말까지도 들었다”며 사실상 해당 공문이 일선 학교에 어떻게든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전교조 경기지부도 이러한 도교육청의 행위에 반박하면서 “폐기에 명확한 기준조차 없었던 만큼 폐기 도서를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도교육청은 각급 학교에서 결정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답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임태희 도교육감과 도교육청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의회 대변인단은 논평을 내고 “도교육청의 도서 폐기는 임태희 교육감의 편향된 교육 철학에서 초래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야당 소속의 국회의원들도 해당 비난에는 합세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문학평론가 출신인 강유정 의원(비례, 민) 등은 상당히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분위기다.
그는 “한강 작가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던 소년의 이야기 ‘소년이 온다’를 쓴 이후로 온갖 지원에서 노골적으로 배제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바 있다, 문화는 함부로 행정과 정치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며 비판의 시선에 합류했다.
21대 국회에서 활동했던 강민정 전 국회의원도 자신의 SNS를 통해 “문화와 예술에 대한 몰이해 인간과 세계를 끊임없이 비틀면서 집단 광기를 세력화해 온 이들이 권력을 잡고 취한 조치가 얼마나 야만적인 것인지 명징해졌다”고 이를 비판했다.
강 전 의원은 “동굴에 갇혀살고 있는 이들이 우리 사회 전체를 동굴로 만들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 현실, 그 속에 교육을 책임진다는 교육청도 있다. 부끄러운 일”이라며 한탄했고 이어 한 작가에 대해 그간 보수정권이 해온 행위들을 낱낱이 열거하기도 했다.
실제 야당에서 주로 제기하고 있는 보수정권의 한 작가에 대한 탄압은 상당수 증명돼 있다. 앞서 강유정 의원이 언급한 블랙리스트 등재는 이미 박근혜 정부 시절 공개된 리스트로 인증돼 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야당을 지지한 문화예술인 등’에 대한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에게 이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했고 수백 명의 예술가들이 이에 포함돼 정권의 탄압을 실제로 받았었다.
한 작가도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다는 이유로 한국문학번역원의 해외문화교류행사 지원에서 배제됐고 2014년 당시 문체부 주최의 세종도서 지원사업에서 이 소설이 ‘사상적 편향성’을 이유로 탈락하기도 했었다.
문학계 일각에서는 이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고 실제 한국문학번역원의 경우 해외문화교류행사 지원서 배제는 됐지만 당시 정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한 작가의 활동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작가가 2016년 자신의 소설 ‘채식주의자’로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에 ‘한강에게 축전을 보내달라’는 내용의 요청을 했으나 당시의 청와대가 거부했다는 문체부 측 진술을 검찰이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한 작가는 전날인 10일 스웨덴 한림원과 가졌던 인터뷰를 통해 “제 소식이 한국 문학 독자들과 제 친구들, 작가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면 좋겠다”며 “아들과 같이 차를 마시며 조용히 자축하겠다, 술은 먹지 않는다”고 덤덤한 수상소감을 밝혔다.
